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보호무역 기조를 강화해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최근 의외의 결정을 내렸다. 전략 산업으로 간주되는 미국 철강회사 US스틸의 일본제철 인수를 승인한 것이다. 이는 전임 바이든 대통령이 국가 안보를 이유로 불허했던 사안이다. 트럼프가 입장을 바꾼 배경은 무엇일까.
US스틸은 1901년 설립된 미국 철강산업의 상징적 기업이다. 한때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했고, 미국 제조업의 자존심으로 불렸다. 작년 말 일본제철이 US스틸 인수 계획을 발표하면서 글로벌 철강업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일본제철은 미국 내 생산기반을 확보하고 북미 시장에서 늘어나는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인수를 추진해 왔다. 특히 전기차 확대와 인프라 투자 증가로 강판 수요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미국 현지 생산거점을 확보하려는 전략적 판단이 있었다.
그러나 바이든 행정부는 이 인수에 제동을 걸었다. 철강은 국가 안보의 핵심 산업이며, US스틸은 국방 물자 조달에도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 주요 이유였다. “전략 자산이 외국 기업에 넘어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을 견지했고, 바이든 대통령은 퇴임 직전 인수 승인을 거부했다. 당시 야당 대선 후보였던 트럼프 역시 “US스틸은 미국에 아주 특별한 회사”라며 부정적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백악관 입성 이후 트럼프는 입장을 바꿨다. “US스틸은 미국에 남고, 본사도 피츠버그에 유지될 것”이라며 인수 승인을 공식화했다. 이어 “이 거래는 미국에 140억 달러의 투자를 유치하고, 7만 개 이상의 일자리를 창출할 것”이라며 긍정적 효과를 강조했다. 일본제철이 인수 과정에서 대규모 투자안을 제시하며 설득에 나선 것이 결정적이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번 결정은 단순한 기업 인수 그 이상으로 해석된다. 경제적 실익과 안보 우려, 정치적 셈법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트럼프는 철강산업 보호에 누구보다 앞장서 온 인물이다. 그런 그가 입장을 바꾼 것은, 미국에 돌아올 경제적 효과가 안보상의 우려를 상쇄할 만큼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일본제철은 당초 계획보다 5배가 넘는 투자안을 제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냉전 시대에는 국가 간 경쟁을 설명할 때 지리와 정치가 결합된 ‘지정학(地政學)’이 중요했지만, 오늘날에는 경제가 정치보다 앞서는 ‘지경학(地經學)’ 이라는 개념이 부상하고 있다. 지경학은 경제를 외교와 안보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국가 전략을 뜻한다. 전략산업 보호와 국가 이익을 우선시하며, 경제정책을 무기처럼 활용하는 접근 방식이다. 트럼프의 이번 결정 역시 단순한 인수 승인이라기보다, 경제적 실익이 명확한 경우에는 외국 자본도 수용할 수 있다는 실용주의적 판단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번 결정은 한국 기업에도 시사점을 던진다. 미국은 동맹국인 일본에 대해서조차 전략산업 인수에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한국 기업들도 미국 내 인수나 대형 투자를 추진할 때, 이런 변수까지 함께 고려해야 하는 시대가 됐다. 단순한 수익성 분석만으로는 부족하며, '전략적 합리성'과 '지경학적 판단력'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트럼프의 이번 선택은 단순한 ‘입장 번복’으로 설명되기 어렵다. 전략 산업을 지키겠다는 정치적 구호와, 막대한 투자와 고용 유치를 통한 경제적 실익 중 트럼프는 후자를 택했다. 이는 향후 글로벌 기업들의 미국 투자 전략에도 중요한 선례가 될 수 있다.
미국 우선주의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외국 자본을 배척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미국의 이익에 부합한다면 외국 기업과도 손을 잡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트럼프식 보호무역의 실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