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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28

사진 찍듯 기억하는 사람들, 인간 사회 거울 같은 존재

사람은 누구나 과거를 기억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억은 흐릿하고 조각나 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왜곡되거나 잊힌다. 인간의 뇌는 모든 정보를 저장하지 않는다. 생존과 감정에 중요한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기록하고, 나머지는 지워버리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래서 우리는 기억이 곧 사실이라고 믿지만, 사실은 기억조차 '해석된 정보'일 뿐이다. 하지만 소수의 사람들은 이 법칙에서 예외다. 그들은 마치 사진을 찍듯이, 과거의 순간을 정밀하게 기억한다. 특정 날짜에 무슨 일이 있었고, 누구와 무슨 말을 나눴으며, 주변에 어떤 냄새가 났는지까지도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있다. 과학적으로는 이를 ‘하이퍼타이메시아(hyperthymesia)’라고 부른다. 전체 인구 중 극소수에게만 나타나는 이 능력은, 축복처럼 보이지만 실..

인문학 2025.04.12

산 아래와 산 위,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1971년, 두 명의 물리학자가 항공기에 원자시계를 싣고 지구를 한 바퀴 비행하는 실험을 진행했다. 이 실험에서 비행기의 시계와 지상에 남겨둔 시계는 눈에 띄지 않지만 분명한 차이를 보였다. 지상보다 높은 고도에 있는 시계가 아주 조금 빠르게 움직였던 것이다. 이후 위성을 이용한 GPS 기술에서도 같은 현상이 반복적으로 관측됐다. 고도가 다르면 중력도 달라지고, 그에 따라 시간의 흐름도 달라진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입증된 셈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시간의 흐름이 관측자의 위치, 속도, 중력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1초, 1분, 1시간은 결코 고정된 기준이 아니라는 거다. 관점에 따라,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

인문학 2025.04.11

민주정치의 한계를 내다본 플라톤의 놀라운 통찰력

지금으로부터 약 2,400년 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인간 사회의 정치가 어떻게 발전하고 타락하는지를 깊이 고민했다. 그는 《국가》라는 책에서, 인간 사회의 정치가 시간이 흐르며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다섯 단계로 나누어 설명했다.  첫 번째는 ‘哲人정치’다. 말 그대로 지혜로운 철학자가 다스리는 정치다. 플라톤이 가장 이상적으로 본 체제다. 이 정치는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지도자가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위해 정치를 운영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이 지혜로운 지도자들이 사라지고 두 번째 단계인 ‘명예 중심의 귀족정치’로 바뀐다. 귀족정치는 용기 있고 명예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나라를 이끄는 체제다. 그런데 귀족정치도 점점 타락한다. 명예보다는 재산을 중시하게 되면서, 부자들이 권력을 독점하는 ‘과..

인문학 2025.04.01

숨 한 번으로 바닷속에서 10여 분 잠영하는 바자우族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남부 해역에는 바다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수상가옥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땅보다 물을 더 가까이 두고 살아간다.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고 조개를 캐며 생계를 이어가는 이들은 바자우(Bajau)라고 불리는 수상 민족이다. 전통적으로 배 위나 해상 주택에서 생활해 온 이들은 땅에 정착하지 않고 바다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독특한 문화를 이어왔다. 바자우 족은 별다른 잠수 장비 없이, 맨몸으로 수심 수 미터 아래에서 10여 분간 잠영이 가능하다. 일반인의 기준에서 보면 거의 믿기 힘든 수치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물속에서 30초에서 1분 정도 숨을 참을 수 있다. 심호흡을 한 뒤에도 1분을 넘기기 어렵고, 훈련된 수영선수나 프리다이버조차 2~3분 이상 버티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

인문학 2025.03.31

자연의 청소부들, 죽음을 먹고 생명을 잇는다

자연계에는 사냥도 채집도 하지 않고, 오직 죽은 동물의 사체만을 먹는 생물들이 있다. 우리는 이들을 ‘청소동물(scavenger)’이라 부른다. 그중에서도 스스로 먹이를 사냥하지 않고, 이미 죽은 뒤에야 접근하는 청소 전문종들이 있다. 이들은 인간에게 혐오감이나 불쾌함을 주기도 하지만, 생태계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대표적인 예가 독수리다. 독수리는 날카로운 부리와 넓은 날개를 가진 맹금류지만, 일반적인 의미의 사냥은 하지 않는다. 대신 병든 동물이나 이미 죽은 사체를 찾아 하늘을 선회한다. 머리에 깃털이 없는 ‘대머리’ 형태도 독특하다. 이는 사체를 뜯어먹을 때 피나 체액이 깃털에 묻지 않도록 진화한 결과다. 한국어에서 ‘독수리’라는 말은 ‘수리’와 혼용되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으로 ‘수리’는 ..

인문학 2025.03.30

인간을 전시했던 시대, 클림트 초상화가 던지는 질문

1887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인종 전시회 당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초상화 한 점이 공개됐다. 주인공은 아프리카의 한 부족 출신 왕자다. 이 작품은 2021년, 한 수집가가 빈의 갤러리에 반입하면서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복원과 감정을 거쳐 클림트의 진품으로 최종 확인됐다. 현재 판매가는 약 240억 원에 이른다. 작품의 미술사적 가치도 크지만, 이 초상화가 주목받는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그려졌던 역사적 배경 때문이다. 클림트는 이 그림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인종 전시회’ 기간에 제작했다. 이 전시회는 단순한 문화 교류의 장이 아니었다. 식민지 출신 사람들을 울타리에 가둬놓고, 대중이 ‘이국적인 존재’로 구경하고 소비하게 만든 이른바 인간동물원의 일환이었다. 19..

인문학 2025.03.29

플라톤의 동굴우상으로 대한민국을 돌아본다

요즘 한국 사회는 마치 거대한 동굴 속에 갇힌 듯하다. 사회 곳곳에서 이념과 진영 논리에 따른 갈등이 첨예하게 벌어지고 있다. 시민들은 각자 자신이 믿는 정보와 해석에만 몰입한 채, 다른 시선은 틀렸다고 단정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진실을 보고 있다고 굳게 믿는다. 이러한 현상은 고대 철학자 플라톤이 2천 년 전 ‘동굴의 비유’를 통해 경고했던 모습과 닮아 있다. 플라톤은 그의 저서 《국가》 제7권에서 인간의 인식이 얼마나 제한적일 수 있는지를 설명했다. 그는 인간을 동굴 속에 사슬로 묶여 벽만 바라보는 죄수에 비유했다. 이들은 바깥에서 비추는 불빛에 의해 비친 그림자만을 현실이라 믿으며 살아간다. 실재하는 대상은 그 그림자를 만든 진짜 사물들임에도, 죄수는 그림자를 전부라고 착각한다. 만약 누군가가 용..

인문학 2025.03.28

새해 인사말에 담긴 비슷한 듯 다른 정서

한중일 세 나라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웃이다.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오랜 역사 속에서 문화 교류도 활발히 이어져 왔다. 그러나 새해 인사말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이 세 나라가 얼마나 다른 정서와 국민성을 지녔는지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인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말한다. 중국인은 “신녠콰이러(新年快乐)”, 일본인은 “아케마시테 오메데토 고자이마스(あけましておめでとうございます)”라고 인사한다. 겉으로는 모두 한 해의 시작을 기념하며 서로에게 덕담을 건네는 말 같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와 정서는 확연히 다르다. 단순한 인사말 하나에도 각 나라 고유의 삶의 태도와 문화 철학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중국의 인사말 ‘신녠콰이러’는 직역하면 ‘즐거운 새해’다. 말 그대로 ‘행복한 한 해’를 기원하는 표현..

인문학 2025.03.27

하인의 신혼집 벽지로 사용된 자산어보

흑산도 유배지에서 조선시대 실학자 정약전은 물고기를 관찰하고 기록했다. 서해 해류를 따라 이동하는 어종을 하나하나 살폈고, 백성들에게 도움이 될 내용을 정리했다. 자산어보는 그렇게 태어났다. 생선의 생김새, 서식지, 잡는 법, 맛까지 담겨 있었다. 조선 후기 민중을 위한 실용 지식서였다. 정약전은 형제 중에서도 과묵하고 책임감이 강한 인물로 전해진다. 동생 정약용도 강진에 유배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뭍으로 나와 그를 만나려 했다. 그러나 풍랑을 만나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정약용은 형의 사망 소식을 뒤늦게 듣고 흑산도로 향했다.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그곳에서 형이 남긴 자산어보를 발견했다. 하지만 책은 온전한 형태가 아니었다. 자산어보는 벽지로 변해 있었다. 정약전이 살던 유배지는 이..

인문학 2025.03.25

40대, 50대 사춘기… 사춘기는 나이순이 아니다

사춘기는 대개 중고등학생 시절에 오는 것이라 여긴다. 감정이 요동치고, 부모에게 반항하며,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방황하는 시기. 하지만 그 시기를 제때 겪지 못한 사람들에게 사춘기는 훨씬 늦게 찾아오기도 한다. 그래서 나온 말이 있다. ‘40대 사춘기’, ‘50대 사춘기’다. 심리학에서 사춘기는 단순한 반항기가 아니다. 자아가 ‘나는 누구인가’를 묻기 시작하는 정체성 탐색의 시간이다. 이는 청소년기에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반드시 그 시기에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자기 성찰의 여유와 조건이 허락되지 않으면, 사춘기는 얼마든지 유예될 수 있다. 가난, 가정폭력, 생계부양, 전쟁 같은 현실은 자아 형성을 가로막는다. 배고픔을 해결하고 가족을 돌보는 일이 먼저인 상황에서, 나는 누구인지 돌아볼 시간은 ..

인문학 2025.0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