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는 대개 중고등학생 시절에 오는 것이라 여긴다. 감정이 요동치고, 부모에게 반항하며,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방황하는 시기. 하지만 그 시기를 제때 겪지 못한 사람들에게 사춘기는 훨씬 늦게 찾아오기도 한다. 그래서 나온 말이 있다. ‘40대 사춘기’, ‘50대 사춘기’다.
심리학에서 사춘기는 단순한 반항기가 아니다. 자아가 ‘나는 누구인가’를 묻기 시작하는 정체성 탐색의 시간이다. 이는 청소년기에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반드시 그 시기에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자기 성찰의 여유와 조건이 허락되지 않으면, 사춘기는 얼마든지 유예될 수 있다.
가난, 가정폭력, 생계부양, 전쟁 같은 현실은 자아 형성을 가로막는다. 배고픔을 해결하고 가족을 돌보는 일이 먼저인 상황에서, 나는 누구인지 돌아볼 시간은 없다. 그렇게 많은 이들이 자신의 사춘기를 뒤로 미룬 채 어른이 되었다.
반대로 청소년기에 사춘기를 겪는다는 건 어쩌면 축복일지 모른다. 그것은 최소한 생존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가정,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주어진 삶의 조건을 의미한다. 한국에서는 이를 ‘중2병’이라 부르며 부정적으로 보기도 하지만, 사춘기를 유예할 만큼 가혹하지 않았던 부모 밑에서 자랐다는 반증일 수 있다. 자녀가 흔들리고 반항한다는 건, 아이가 잘 자라고 있다는 신호다.
멀쩡히 대학을 졸업하고도 전혀 다른 전공을 다시 공부하려는 사람.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글을 쓰거나 농사를 짓겠다는 사람. 이들은 모두 사춘기 유예의 또다른 얼굴이다. 한 번도 자신에게 물어보지 못했던 질문에, 늦게서야 답하려는 몸짓이다.
청소년기의 사춘기가 성장통이라면, 중년의 사춘기는 회복통이다. 미뤄둔 감정을 되찾고, 묻지 못한 질문을 다시 꺼내는 일이다. 이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피할 수 없다. 정체성을 찾는 이 숙제는 인생이 끝나기 전까지 반드시 풀어야 할 과제처럼 남아 있다. 어쩌면 이 숙제를 풀지 못한 채로는 인간은 죽음조차 편히 맞이하지 못하는 존재일지 모른다.
보릿고개를 겪고,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온 어머니 세대는 더욱 복합적인 시기를 맞는다. 일반적으로 사춘기가 정신적 변화의 시기라면, 폐경기는 육체적 변화의 절정이다. 50대 전후로 이 두 변화가 동시에 밀려오면, 여성들은 울고 웃고 반항하며, 몸까지 아프다. 그 시절 하지 못한 사춘기를, 이제야 온몸으로 겪는 것이다.
중년의 감정 기복이나 일탈을 단순한 위기나 일탈로만 볼 수는 없다. 오히려 그것은 정체성 형성을 향한 인간 본능의 회복이다. 자신의 감정을 바라보고, 원하는 삶이 무엇이었는지를 되묻는 일. 그것이 중년 사춘기의 본질이다.
사춘기는 반드시 10대의 몫만은 아니다. 정체성을 묻는 순간이 사춘기라면, 우리는 언제든 그 시기를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은 죽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 같은 것이다. 그 과정을 지나지 않으면, 신은 인간이 다가오는 죽음조차도 자신답게 맞이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