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안중근 열사를 기릴 때, 안준생도 돌아보자

news1657 2025. 3. 7. 08:27
728x90
반응형

칼럼 이미지 사진 19

 

일제강점기, 1909년 중국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를 모르는 한국인은 거의 없어도, 그의 가족이 겪은 고난과 희생, 특히 둘째 아들 안준생의 선택과 그 후손들의 삶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안중근 의사가 의거를 단행할 당시, 그의 두 아들은 각각 6세와 4세였다. 둘째 아들 안준생은 어린 나이에 하얼빈 감옥에서 아버지를 면회해야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형 안분도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가족은 일제의 감시 아래 조선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하얼빈에서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그들의 고난을 접한 상하이 임시정부는 가족을 상하이로 이주시키고 거처와 생활비를 지원했으나, 재정적 한계로 인해 충분한 도움을 주지 못했다. 가족은 다시금 극심한 가난과 감시 속에서 힘겹게 버텼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총독부는 안중근의 가족을 회유하기 시작했다.

 

1938,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는 서울에 박문각(博文閣)’이라는 시설을 건립했으며, 이는 조선총독부 직속 기관으로 운영됐다. 박문각은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기 위한 공간으로, 일제가 조선 지배의 정당성을 홍보하고 식민 통치에 대한 순응을 유도하기 위한 기념 시설이었다. 일제는 박문각 낙성식에서 안준생에게 “낙성식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에게 머리를 숙이고 사죄하면 평생 생활을 보장하겠다.”며 공개 사죄를 요구했다.

 

가난과 감시 속에 살아온 안준생은 결국 조선총독부의 회유를 받아들였고, 낙성식에서 일본 측 인사 앞에 고개를 숙였다. 이 장면은 동아일보 등 당시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는데, 우리 민족은 이에 분노했다. 일제는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는 선전 도구로 삼았다.

 

이 사건은 백범 김구 선생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안준생을 '민족의 수치'라고 표현하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김구는 안준생을 민족의 반역자로 규정하며 내 손으로 직접 처단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안준생은 이후 아버지는 민족의 영웅이지만, 나는 가난과 감시 속에서 살아가는 나약한 시민에 불과하다고 항변했다고 한다.

 

안준생은 이후 민족적 비난과 사회적 압박 속에서 생계를 위해 일제의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활동했고, 결국 미국행을 택했다. 어머니와 부인, 아들을 먼저 미국으로 보낸 후, 자신은 고국 생활을 정리하기 위해 잠시 귀국했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북한군에 체포되었고, 이후 종적을 감췄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의 아들, 즉 안중근의 손자는 미국에서 의과대학에 진학해 의사가 되었고, 평생을 그곳에서 보냈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안중근 의사의 후손이 고국이 아닌 타국에서 살아야 했다는 현실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안중근 의사는 여전히 영화나 뮤지컬을 통해 국민들의 기억 속에 살아 있다. 그의 이야기는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는 대표적 독립운동 서사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그의 의거만큼이나 소중했던 가족들의 아픔과 그들이 감당해야 했던 무게는 쉽게 기억되지 않는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