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는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식재료지만, 그 역사를 살펴보면 인류 문명과 함께한 변화의 흐름을 확인할 수 있다. 단순한 구황작물이 아니라 전쟁과 기근을 거치며 전 세계인의 식탁을 바꾼 중요한 작물이었다.
감자의 기원은 남아메리카 안데스 산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잉카인들은 기원전 몇 천 년 전부터 감자를 재배했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자랄 만큼 생명력이 강하고, 영양가가 높아 잉카 문명의 핵심 작물로 자리 잡았다. 당시 잉카인들은 감자를 단순한 식량으로만 활용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가공해 장기간 보관할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저장된 감자는 전쟁과 기근 속에서 중요한 식량원이 되었다.
16세기 초, 스페인 탐험가들이 감자를 유럽으로 들여왔다. 그러나 유럽인들은 처음에는 감자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땅속에서 자라는 작물이라는 점이 불길하게 여겨졌고, 감자가 속한 가지과 식물 일부가 독성을 지닌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악마의 음식’이라는 불신이 확산되었다.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감자가 오랫동안 가축 사료로만 사용됐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감자를 건강에 해롭다고 여기고 경작을 금지하기도 했다.
18세기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감자의 가치를 깨닫고 백성들에게 재배를 장려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감자를 기피했다. 이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감자를 ‘왕실의 작물’로 선포하고 감자밭을 병사들로 지키게 했다. 금지된 것에 대한 호기심은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들었고, 농민들은 몰래 감자를 훔쳐 심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감자는 프로이센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프랑스에서도 감자의 대중화가 이루어졌다. 농학자 앙투안 파르망티에는 감자의 영양적 가치를 증명하며 적극적으로 보급을 시도했다. 그는 감자가 건강에 유익한 식품임을 알리기 위해 다양한 연구를 진행했고, 감자를 이용한 요리를 선보이며 대중의 인식을 바꿔 나갔다. 이후 프랑스에서도 감자를 활용한 다양한 요리법이 개발되었고, 점차 유럽 각국에서 감자는 주요 식량 작물로 자리 잡았다.
감자의 보급이 가져온 가장 극적인 사례는 19세기 아일랜드에서 나타났다. 당시 아일랜드에서는 감자가 주식으로 자리 잡으며 국민 대다수가 감자에 의존했다. 감자는 경작이 쉬웠고 적은 면적에서도 높은 수확량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자에 대한 지나친 의존은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1845년, 감자역병이 발생하며 감자 농사가 대규모로 실패했고, 아일랜드는 극심한 기근에 빠졌다. 1845년부터 1852년까지 약 100만 명이 사망했고, 200만 명 이상이 미국과 호주 등으로 이주했다.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기록된 이 사건은 인구 구조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감자는 도시 노동자들에게 저렴하고 영양가 높은 식량으로 각광받았다. 러시아에서는 감자가 보드카의 원료로 사용되었고, 독일에서는 맥주와 함께 즐기는 필수적인 안주가 되었다. 한국에서도 전쟁 이후 감자는 중요한 구휼작물로 활용되며 보릿고개를 견디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오랜 불신과 거부를 극복하고 인류 문명을 변화시켜 온 감자는 역사의 산증인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