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맥주는 세계적으로 가장 사랑받는 술 중 하나다. 독일 뮌헨의 옥토버페스트, 일본 삿포로의 맥주 축제 등은 해당 국가의 맥주 문화와 자부심을 반영한다. 그러나 한국 맥주는 오랫동안 "맛이 없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이러한 배경에는 보릿고개 시절의 경제적 어려움이 자리하고 있다.
한국에서 맥주 생산이 시작된 것은 20세기 초반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이 세운 동양맥주(현 OB)와 조선맥주(현 하이트진로)가 한국 맥주의 기원이 됐다. 해방 이후에도 이 두 회사는 지금까지도 과점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한국 맥주가 밋밋하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 중 하나는 호맥(홉+맥아) 비율이 낮기 때문이다. 식량이 부족했던 시절, 술을 만드는 데 보리를 많이 사용할 수 없었고, 이에 따라 주세법 시행령 제3조에서는 맥아 함량이 최소 10% 이상이면 맥주로 인정하도록 규정했다. 대형 맥주 제조사들은 맥아 함량을 30% 수준으로 유지하며, 나머지는 옥수수 전분, 쌀, 감자 전분 등 부재료를 넣어 생산해 왔다. 최근 들어 맥아 함량을 50%까지 높인 프리미엄 맥주도 출시되었지만, 맥아 비율이 높아지면 제조 비용이 상승하기 때문에 기존 업체들은 굳이 맥아를 더 사용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맥주 본고장으로 불리는 독일 뮌헨의 옥토버페스트에서 제공되는 맥주는 해당 연도에 수확한 보리로 만든 100% 맥주다. 삿포로 맥주 역시 고품질 보리와 홉을 사용하여 깊은 풍미를 자랑한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맥아 순도를 유지하며, 이를 마시는 소비자들은 특유의 구수한 향과 부드러운 목넘김을 경험할 수 있다. 반면, 한국 맥주는 맥아 비율이 낮아 맥주 본연의 깊은 맛보다는 청량감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해외여행이 자유화되면서 외국에서 100% 맥주를 경험한 한국 소비자들은 왜 우리는 이런 맥주를 만들지 못하는지 의문을 품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국내에서도 맥주 시장 개방과 수제 맥주 활성화에 대한 요구가 커졌다. 수제 맥주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리는 듯했지만, 대형 맥주사의 로비가 시장 변화의 걸림돌이 됐다.
대형 맥주사들은 수제 맥주가 유통 과정에서 변질될 위험이 있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유통 규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압력을 행사했다. 그 결과, 수제 맥주는 군 단위 지역을 벗어나 판매할 수 없도록 제한되었고, 이는 수제 맥주 업계의 성장을 크게 저해했다. 초기에는 전국적으로 수많은 수제 맥주 전문점이 생겨났으나, 높은 원가와 유통 한계로 인해 대부분 폐업했고, 현재는 극소수의 업체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 무렵, 세계 각국의 프리미엄 맥주가 국내 시장에 들어오면서 소비자들은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도 대형 맥주사의 독점 구조가 또 개입됐다. 현행법상 주류 면허를 취득한 업체들은 맥주 수입이 가능하지만, 실제로 시장을 지배하는 것은 두 개의 대형 맥주사다. 국산 맥주는 과점 체제로 이익을 내고, 해외 맥주는 유통 시장을 장악하면서 소비자 취향 변화에 크게 민감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맥주 제조사들의 수익을 더욱 높여준 요인 중 하나는 소맥 문화다. 한국이 IMF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소맥 문화가 급속도로 확산됐는데, 소주를 타서 마시기에는 걸쭉한 맥주보다 탄산이 많은 맥주가 더 적합했다. 여기에 한류 열풍까지 더해지면서 한국의 소맥 문화가 해외에서도 주목받기 시작했다. 일본에서도 한국식 소맥을 본떠 기존의 100% 맥주 외에 50%, 30%로 맥아 비율을 낮춘 제품을 출시하며 소비자층을 넓혀가고 있다. 이는 한국의 소맥 문화가 맥주 시장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온 사례다.
하지만, 한국 맥주가 맥아 비율이 낮고 탄산감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온 것은 바뀌지 않는다. 보릿고개의 유산을 안고 있는 한국 맥주는 소맥이라는 독창적인 음주 문화를 만들어냈고, 한류와 함께 세계적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국민 대다수는 100% 맥주의 풍미가 어떤지를 경험해 보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맥주의 발전 방향을 다시 한 번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