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인류사의 또 다른 비극 '히틀러의 아이들’

news1657 2025. 3. 14.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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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나치는 유대인 학살로 악명이 높다. 히틀러는 유대인을 공격하기 위해 그들이 인종적으로 열등하다는 논리를 내세웠고, 이를 학살의 명분으로 삼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 아리아인 혈통이 우수하며, 이를 더욱 확장해야 한다는 논리를 발전시켰다. 이러한 논리 속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레벤스보른(Lebensborn) 프로젝트'였다.

 

1935, 나치는 순수 아리아인의 혈통을 보호하고 확장하겠다는 목표 아래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친위대(SS) 대원들과 아리아인 여성들 간의 출산을 강요해, 태어난 아이들을 국가가 직접 관리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하인리히 히믈러의 주도로 시행된 이 계획은 단순한 출산 장려 정책이 아니라, 국가가 직접 인종 개량을 주도하며 인간을 실험 대상으로 삼은 비극적인 시도였다.

 

아리아인 혈통의 기준은 금발과 푸른 눈, 창백한 피부, 평균 이상의 신장이었다. 나치는 이를 '북유럽 유형'의 이상적인 신체특징으로 규정하고, 이를 기준으로 출산을 장려하거나 점령지에서 아이들을 선별했다. 특히 북유럽과 동유럽 국가들에서 '아리아인 특징'을 지닌 아이들은 부모와 강제로 분리돼 독일 가정에 입양되거나 레벤스보른 시설로 보내졌다. 일부 아이들은 자신의 출신을 모른 채 독일 사회에 동화되었고, 성장 후 진실을 알게 된 경우도 많았다.

 

나치는 2차 세계대전 기간동안 북유럽과 동유럽에서 아리아인의 특징을 가진 아이들을 강제로 납치해 독일 가정에 입양시키거나 레벤스보른 시설에서 양육했다. 독일뿐만 아니라 노르웨이, 덴마크, 폴란드 등에서도 운영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수는 2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노르웨이에서는 독일 군인과 현지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전후 심각한 차별과 박해를 받았다.

 

전쟁 후 레벤스보른 출신 아이들은 '히틀러의 아이들'이라는 낙인 속에서 극심한 사회적 배척을 겪었다. 이들은 나치의 실험적 정책의 산물로 여겨졌고, 독일과 점령지 국가들 모두에서 존재를 부정당했다. 특히 노르웨이에서는 '독일 놈의 자식'이라는 멸칭 속에 교육과 취업 기회에서 차별받았으며, 일부는 정신병원이나 보호시설에 강제 수용되기도 했다. 독일에서도 이 아이들은 전후 사회에서 외면받았으며, 많은 경우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당시 레벤스보른 프로젝트로 태어난 이들은 80대에 접어들었다. 이들은 성인이 된 후 자신들의 뿌리를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대부분의 기록이 소각되거나 감춰져 있어 진실을 알기 어려웠다. 부모를 알지 못한 채 성장한 이들은 생물학적 부모를 찾으려 했으나, 정부 기관과 사회조차 이들을 외면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노르웨이 출신 앙케 리(Anke Ri)라는 여성은 60대가 되어서야 자신이 레벤스보른 출신임을 알게 됐다. 그는 생부를 찾기 위해 독일 정부와 노르웨이 당국에 수십 년간 요청했으나, 어떠한 자료도 제공받지 못했다. 결국 그는 DNA 분석을 통해 아버지가 한때 친위대 장교였으며, 이미 사망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독일의 한 남성은 70대가 되어서야 자신이 레벤스보른 출신임을 확인했고, 어머니가 전쟁 중 독일 군인에게 강제로 이용당했다는 충격적인 진실을 접했다.

 

레벤스보른 프로젝트는 전체주의적 선동과 광기가 만들어낸 비극이다. 인간의 존엄성과 다양성을 무시한 채 사회적 선동과 광기로 몰아가는 흐름은 언제든 되풀이될 수 있다. 나치의 레벤스보른 프로젝트는 단순한 과거의 일이 아니라, 지금도 경계해야 할 인간성 상실의 대표적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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