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경그룹이 모태기업인 애경산업의 매각을 추진하고 있다. 생활용품과 화장품으로 그룹의 기틀을 다진 핵심 기업을 내놓는 것은 곧 '정체성'의 포기로 해석된다. 이는 단순한 계열사 정리가 아닌, 그룹의 생존을 위한 고육지책이라는 평가다.
이번 결정의 배경에는 제주항공 사태가 자리하고 있다. 지난 1월 무안국제공항에서 발생한 제주항공 여객기 사고 이후, 항공업 특유의 높은 고정비와 경기 민감성이 그룹 전반의 유동성 위기를 가중시켰다. 사고는 단발성이었지만, 투자자들 사이에서는 '애경 전체에 이상 신호가 왔다'는 해석이 빠르게 확산됐다. 실제로 최근 채권시장에서 애경 계열사 회사채의 금리가 눈에 띄게 상승했다.
애경그룹은 현재 지주회사인 AK홀딩스를 통해 지배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AK홀딩스는 제주항공, 애경케미칼 등의 지분을 보유하며 핵심 투자지주 역할을 해왔다. 그룹의 이익 중심은 이미 항공과 화학 분야로 쏠려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상장사인 애경산업은 비교적 주가와 거래량이 안정적이며, 투자자산으로서 매각이 용이하다. '당장 팔 수 있는 자산'이라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상징성이다. 애경산업은 1954년 창립된 애경그룹의 모태다. 한국전쟁 이후 허허벌판에서 시작해 치약, 비누, 세제 같은 일상용품으로 국민 생활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다.
'2080 치약'은 그 상징이다. 1990년대 중반 출시된 이 제품은 '20세까지 80세 치아를'이라는 콘셉트로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실제로 "2080 하나로 가족이 다 쓴다"는 광고 문구는 당시 소비자들에게 강한 신뢰를 줬고, 국내 치약 시장을 재편했다. '2080'이라는 숫자가 생활용품 브랜드로 자리 잡을 만큼의 대중성은 애경산업의 마케팅 역량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케라시스 샴푸'도 마찬가지다. 고급 이미지를 내세우며 LG생활건강, 아모레퍼시픽 등 대형 뷰티업체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고, 특히 '살롱 케어' 콘셉트는 중저가 시장을 지배했다. 2000년대 중반, 국내 홈쇼핑과 드럭스토어의 성장과 함께 케라시스는 '국민 샴푸'로 떠올랐다.
하지만 그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K-뷰티가 세계 시장을 개척하던 시기, 애경산업은 내수 위주 사업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제 그룹은 주력 자산과 비주력 자산을 선별하는 단계에 들어섰다. 제주항공은 리오프닝 이후 매출 회복세를 보이고 있고, 애경케미칼은 수익 기반이 안정적이다. 반면 애경산업은 성장이 정체된 상황에서 매각 가치가 높다. 모태기업이지만, 전략적 자산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번 결정은 두산그룹이 자금난 속에 클럽모우CC와 두산인프라코어를 매각했던 장면과 닮았다. LG가 배터리사업을 떼어내고 LG에너지솔루션을 만든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체성을 지킬 것이냐', '생존을 택할 것이냐'의 양자택일에서 애경그룹은 후자를 택한 것이다.
모태기업의 매각은 아프다. 그러나 어쩌면, 이 선택이야말로 가장 전략적인 결단일 수 있다. 살아남은 기업만이 다시 전통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