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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28

‘1m 길이’에 담긴 인간 평등 정신

길이는 문명의 발전과 함께 변화해왔다. 인류가 측정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순간부터, 정확한 기준을 마련하려는 시도는 계속됐다. 하지만 각 지역과 시대마다 다른 기준이 사용되면서 상업과 행정에서 큰 혼란이 발생했다. 이러한 혼란을 정리하고 보편적인 기준을 마련하려는 노력이 결국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미터(m)’라는 개념을 탄생시켰다. 1미터의 개념은 18세기 프랑스 혁명기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프랑스는 지역마다 서로 다른 단위 체계를 사용하고 있어 행정과 경제적 비효율이 심각했다. 혁명 정신이 확산되던 시기, 모든 국민이 동일하게 사용할 수 있는 단위를 만들자는 논의가 시작됐다. 길이의 측정 방식이 지역과 신분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는 것은 불평등의 상징이었다. 1791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는 보편적 길..

인문학 2025.03.07

안중근 열사를 기릴 때, 안준생도 돌아보자

일제강점기, 1909년 중국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를 모르는 한국인은 거의 없어도, 그의 가족이 겪은 고난과 희생, 특히 둘째 아들 안준생의 선택과 그 후손들의 삶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안중근 의사가 의거를 단행할 당시, 그의 두 아들은 각각 6세와 4세였다. 둘째 아들 안준생은 어린 나이에 하얼빈 감옥에서 아버지를 면회해야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형 안분도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가족은 일제의 감시 아래 조선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하얼빈에서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그들의 고난을 접한 상하이 임시정부는 가족을 상하이로 이주시키고 거처와 생활비를 지원했으나, 재정적 한계로 인해 충분한 도움을 주지 못했다. 가족은 다시금 극심한 가난과 감시 속에서 힘겹게 버텼다. 이러한 ..

인문학 2025.03.07

달력의 역사 그리고 사라진 날들

인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시간을 측정해왔다. 밤하늘을 지배하는 달은 주기적으로 차고 기울었고, 대략 한 달이 30일이라는 개념을 형성하게 했다. 계절이 반복됨을 인지하며 12달을 기준으로 한 음력이 등장했다. 그러나 모든 문명이 음력에만 의존한 것은 아니었다. 고대 이집트 문명은 나일강의 범람 주기를 예측하는 것이 생존과 직결되었기에 더욱 정밀한 달력 체계를 모색했다. 음력만으로는 범람 시기를 정확히 맞추기 어려웠고, 태양의 움직임을 기반으로 한 태양력을 발전시켰다. 이 태양력은 1년을 365일로 설정하고, 윤년 개념을 도입해 계절과의 오차를 줄이는 혁신적인 방식이었다. 이집트를 정복한 로마는 자신들의 달력보다 이집트 태양력이 더욱 정확하다는 점을 깨닫고 이를 도입했다. 기원전 46년, 율리우스 카이사르..

인문학 2025.03.06

원앙새에 대한 한국인의 오해

원앙새는 오랫동안 부부 금실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결혼 장식품으로 활용되기도 하고, ‘원앙처럼 살아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동물학자들의 연구 결과, 원앙은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평생 한 짝과 함께하는 새가 아니였다. 동물학자들은 생각했다. 최고의 고등동물인 인간도 쉽지 않은데, 하등 동물인 조류에서 평생 한 짝만을 사랑한다는 것이 과연 맞을까? 라는 합리적인 의문에서 연구는 시작됐다. 동물학자들은 24시간 감시 카메라와 GPS 추적 장치를 활용해 원앙의 행동을 면밀히 분석했다. 그 결과, 원앙은 매년 새로운 짝을 찾아 번식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특정 개체에 대한 애착보다는 짝을 이루는 자체가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전략이었다. 이는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믿어왔던 이미지와 전혀 다르다. 더..

인문학 2025.03.05

QR코드와 샤인머스캣의 얄궂은 운명

QR코드와 샤인머스캣이 일본에서 개발된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QR코드는 1994년 일본 덴소 웨이브의 하라 마사히로가 개발했고, 샤인머스캣은 1988년 일본에서 ‘아키즈21호’와 ‘하쿠난’ 교배로 만들어졌다. 이후 2006년 품종 등록이 완료됐다. 하지만 이 두 가지 혁신적인 제품은 일본을 벗어나 각기 다른 나라에서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했다. QR코드는 중국에서, 샤인머스캣은 한국에서 폭발적으로 확산됐다. 일본인들이 보기엔 얄밉고 아쉬운 상황이다. QR코드는 중국에서 전자결제와 온라인-오프라인(O2O) 연결을 위한 필수 기술로 자리 잡았다. 알리페이와 위챗페이 등 모바일 결제 시장은 QR코드 없이는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 의존도가 높다. 샤인머스캣도 종자 특허 보호가 종료된 2014년 이후 한국..

인문학 2025.03.04

앞당겨진 두 달, 그리고 계절의 불편함

우리는 매년 1월 1일을 새해 첫날로 맞이한다. 하지만 그 날이 과연 새로운 시작에 적절한 시점인지 돌아보면 의문이 든다. 해가 가장 짧고 밤이 긴 한겨울에 새해를 맞이하는 것이 인간의 생체리듬과 자연의 순환에 부합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2천 년 전 인류는 본래 3월이 한 해의 시작이었다. 이는 농경 사회에서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겨울이 지나고 날이 따뜻해지며 농사가 시작되는 계절, 군대가 이동하기 좋은 시기가 곧 한 해의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10개월 동안 활발하게 활동한 후, 해가 가장 짧은 12월이 되면 동면에 가까운 휴식기에 들어갔다. 그리고 3월이 오면서 다시금 새로운 한 해를 준비했다. 오늘날의 12월을 의미하는 'December'가 본래 '열 번째 달'이라는 뜻이었고..

인문학 2025.03.03

정책은 결국, 사람을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다.

육아휴직은 더 이상 낯선 제도가 아니다. 지난해 육아휴직자의 남성 비율이 30%를 넘어섰다는 점은 우리 사회가 일과 가정의 균형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정책 시행 역사를 따져보면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 조선 세종 시대에도 현대 육아휴직의 원형이라 할 만한 제도가 있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세종은 여성 노비에게 출산 전후 100일간의 휴가를 보장했을 뿐만 아니라, 남편 노비에게도 30일간의 출산휴가를 허용했다. 이는 단순한 시혜적 조치가 아니라, 육아가 여성만의 몫이 아니라는 시대를 앞선 인식에서 비롯된 정책이었다. 세종 12년(1430년) 10월 19일, 세종은 기존의 관노비 출산휴가를 대폭 늘리면서 "출산..

인문학 2025.03.02

서울 남산을 가려야 했던 70년대 한국

서울 도심 한복판, 서울시청 맞은편에 자리 잡은 프라자호텔. 시청 앞 광장을 거닐던 이들이 한 번쯤은 궁금해했을 법한 건축물이다. 왜 시청 앞에서 남산을 조망할 수 없도록 이 호텔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을까. 프라자호텔이 들어선 이유를 이해하려면 반세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60~70년대, 서울의 도심 재개발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던 시기였다. 당시 서울시청에서 남산을 바라보면 그곳에는 무허가 판자촌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산업화의 그늘 속에서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이 남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아갔고, 남산은 가난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전환점이 된 사건은 1966년 10월,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의 방한이었다. 베트남전에 참전 중이던 한국군을 격려하기 위해 방문한 존슨 대통령은 서울시..

인문학 2025.03.01